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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특별기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王子) 영분공(永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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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김영호 작성일20-09-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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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김영호영분공은 시조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閼智)공의 29세이고, 신라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사이에 태어난 3남1녀 중 제삼왕자이다. 휘는 명종이고, 시호는 영분공이며 관(官)은 경주군(慶州君)이다.
 
  공이 태어난 시기는 미상이나, 당시 신라의 국세는 장군과 성주가 할거하여 왕도 주위를 겨우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국은 수백 개에 이르는 호족과 거성으로 분해되어 무질서와 파괴가 극심한 때였다.
 
  부왕이 9년간 통치를 하다가 고려 태조에게 손국(遜國) 할 때까지 신라의 마지막 왕자였다. 공은 고려 광종11년에 경주군(慶州君)으로 봉작되어서 경주김씨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천성(天成) 2년 정해 9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에 이르자 고려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11월에 왕경을 엄습해 왔다.
 
  이 때 경애왕과 비빈 및 종척이 포석정에서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창졸간에 당하고 말았다.
 
  경애왕의 족제인 부(傅)가 견훤에 의하여 31세가 되던 927년에 즉위하니 신라 제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에 즉위하였으나 사직을 구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다만 왕건과 견훤의 양대 세력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9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청태 2년 을미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남의 소유가 되었으며, 국력이 약하고 형세가 고단하여 스스로 편안할 수 없게 되어 신하들에게 고려 태조에게 양국 할 것을 논의하니, 신하들의 가부가 분분하였다.
 
  태자는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과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합하여 힘이 다한 연후에 그만 두어야지 어찌 천년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였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러하여 어찌할 수 없는데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를 땅에 바르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시랑 김봉휴 편에 글을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곡읍한 후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에 들어가서 마의와 초식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차자 황공은 부왕의 영정을 본떠 만들어서 처자를 버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해인사에 봉수 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화엄에 속하여 부도가 되었다.
 
  이름을 범공으로서 후에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건 태조에게 귀순하였는데, 향차(香車)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쳐 길목이 막히고 구경하는 자가 담을 이루었다.
 
  태조가 교외로 나가 맞이하여 궁궐 동북의 한 구석에 정승원을 내리고, 황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경순왕을 정승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였다.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원장도 모두 임용하였다. 신라를 고쳐서 경주라 하였고,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왕건 태조의 손자 경종 주(伷)가 정승공의 딸을 비로 맞이하였으니 헌승왕후이다. 이로서 정승공을 봉하여 상부로 삼았다.
 
  이상과 같이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면, 경순왕은 왕건 태조에게 양국하여 백성의 목숨을 지켰고 시종한 원장(員將) 모두가 그대로 고려에서 임명되어 누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였으며,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라 왕위를 계승한 자는 모두 경순왕의 자손이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신라 유민들은 자발적으로 반월성에 경순왕사당을 마련하여 대제를 봉행하며 경천순인하신 덕의를 숭모하였다.
 
  영분공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기 위해 송도로 갈 때 부왕의 대의(大義)에 순종하여 모후(母后) 죽방부인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비록 두 형은 부왕을 떠났지만 경순왕을 배종(陪從)하였다.
 
  송도에서 부왕을 25년간 받들며 위자지도를 다했으며, 부왕이 상부의 칙명을 받은 후로는 그 명에 따라 계림에서 살면서 광종으로부터 경주군(慶州君)으로 봉군되어 식읍 일만호와 신라 유민들을 다스리며 충효양전으로 생애를 보냈다. 묘소는 경주시 동방동 형제산 서록에 소재하며, 경주에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 왕자(王子)의 산소이다.
교육학박사 김영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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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