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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욕심·정쟁 없던 신라 초기 왕좌 `요순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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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회장 석진환 작성일20-02-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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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대종회 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회장 석진환] 중국 역사상 '두 번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표현하는 말로 요(堯)나라와 순(舜)나라를 일컫는'요순시절(堯舜時節)'이란 표현을 자주 하는데 신라 초기의 왕좌(王座)도 욕심이나 정쟁(政爭)도 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석탈해왕께서 재위시에 늘 하신 말씀이"내가 빙장어른과 처남의 은덕으로 왕좌에 오르게 되었으니 짐의 뒤에는 처족에게 다시 왕위를 잇게 함이 옳을지니라"하신 말씀대로 석탈해왕이 돌아가시자 신라의 태조 박혁거세왕의 혈통인 박씨에게 되돌려 주게 되었는데 3대 유리왕의 태자(둘째 아들)인 박파사(朴婆娑)를 제5대왕으로 삼게 하였으며, 이어서 6대 박지마왕. 7대 박일성왕, 8대 박아달라왕까지 이어젔다.

  서기184년(갑자년) 박아달라왕(阿達蘿王)께서 돌아가셨으나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회의를 열어 석탈해왕의 손자이며 각간(신라 1등벼슬) 구추(仇鄒)의 아들인 석별휴(昔伐休)를 신라 제9대 왕(재위 184년~196년)으로 세우게 되었다.

                        왕이 되신 석벌휴왕은"나 역시 석탈해 할아버지가 하시던 선정(善政)을 그대로 이을 것인 바, 나는 석씨로 왕이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박씨가 건국한 나라이므로 국조(國祖)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 예(禮)와 도(道)를 따를 것이니라"고 뜻을 밝혔다.

  석벌휴왕은 풍운(風雲 : 바람과 구름)이나 일월성신(日月星辰 :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나 가뭄, 그해에 풍년이 들것인가 흉년이 들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보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어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불렀다.

                        서기185년(을축년 왕2년) 정월에 친히 시조 묘에 직접 제사를 올린 후 궁으로 돌아와서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大赦免)을 실시하였다. 그 해(왕2년) 2월 파진찬(신라 4등벼슬) 구도와 일길찬(신라 7등벼슬) 구수혜가 좌우 군주(郡主 : 신라 지방관 직책이며 군사권도 행사하는 지휘관이다. 전쟁시에는 군사의 지휘관이기에 대장군, 즉 장군격이다)가 되어서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고 한다.

  다음 해(병인년 왕3년) 정월 석벌휴왕께서는 신하들을 대동하여 친히 주(州) 군(郡)을 순행하여 민정과 풍속을 시찰하였다. 7월에는 남신현(南新縣)에서 농부들이 지은 상서로운(복되고 길한) 쌀을 왕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다음해 서기187년(정묘년 왕4년) 3월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 저수(貯水)와 농사 및 재해방지를 위한 치수(治水)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동시, 농사짓는 시기도 때를 잃지 않도록 계몽하고 독려했다고 한다.

  서기 192년(임신년 왕9년) 정월에 국양(國良)을 아찬(신라 6등벼슬)으로 임명하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신라 7등벼슬)으로 임명하였다. 서기193년(계유년 왕10년)3월 한지부(漢紙部 : 신라 여섯마을, 6부중 하나로 한지마을이라 보면된다)에서 임신했던 여자가 한꺼번에 다섯쌍동이(4남1녀)를 출산했다고 한다.  <계속>
석씨대종회 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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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