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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제24화 석씨왕가의 영화는 영원한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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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6-0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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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흘해왕 37년(서기 346), 왜의 군사들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상륙하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고 계속 진군하여 금성을 포위하는 등 순식간에 신라를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어 맞 싸우라고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하기를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어려우니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거나 군량미가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그렇다고 여겨 성문을 굳게 닫고 군사를 내어 보내지 않았다.
 
  몇일이 지나자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지쳐서 물러가려 할 때,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도록 하여 가볍게 쫓아버렸다. '原文 :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飡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석흘해왕 때 신라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닥쳤으나, 왕은 민생(民生)을 친히 돌보시면서 양식을 나눠 주는 등으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선정을 베풀었다. 서기313년(흘해 4)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는데다가 겹쳐서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석흘해왕은 각지에 사신을 보내 지역별로 나라가 비축하고 있던 곡창의 문을 열어 곤경에 빠진 백성을 구휼(救恤)하게 했다.

                        이듬해에는 궁궐을 중수했으나 가뭄이 들자 이를 중단했고, 317년(흘해 8)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심하게 들자 왕은 옥에 갇힌 죄수들을 직접 심사해 많은 수의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9년(서기 318) 가뭄 이후 농업을 복구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많이 시키는 중이었는데,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지난 해에는 가뭄과 재해로 농사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금년에는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었으니 노역 등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시행하는 각종 공사나 일들은 모두 중지하라"고 하시어 모든 강제노역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밖에 344년(흘해 35) 여름에는 큰 나무가 뽑힐 정도로 심한 태풍이 닥쳤으며, 350년(흘해 41)에도 큰 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수많은 민가가 물에 잠기고, 산사태가 13곳에서나 발생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석흘해왕 때에 백골제(碧骨堤)를 쌓았으며, 둑의 길이가 1800보(步)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330년(흘해 21), '삼국유사'에는 기축년(己丑年)인 32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벽골제가 위치한 김제(金堤)가 백제의 영토였음을 고려하면 후대에 석흘해왕의 치적으로 윤색되어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35년(서기 344)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궁궐 남쪽의 큰 나무가 뿌리채 뽑혔다. 36년(서기 345) 봄 정월, 강세(康世)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그리고 2월,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자고 하였다. 39년(서기 348), 궁궐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41년(서기 350) 봄 3월, 황새가 월성(月城) 귀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 4월, 큰비가 열흘 동안 내려 평지에 물이 3~4척(尺)이나 고였고, 관청건물과 민가가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으며, 산이 13군데나 무너졌다. 석흘해왕은 356년(흘해 47) 여름에 붕어하셨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김씨(金氏)인 김미추왕의 조카 김내물마립간(김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석흘해왕의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왕실 간의 결혼을 요청해온 왜왕에게 딸이 이미 시집갔다며 거절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들은 없었으나 딸은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석탈해왕을 시작으로 신라 초기 찬란한 문화와 태평성대를 창조했던 석(昔)씨 여덟왕에 걸친 173년 왕가(王家)의 영화는 영원한 역사 속으로 막을 내렸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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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