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명승지인 주상절리 품고있는 부자마을 `읍천 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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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6-18 19:17본문
↑↑ 읍천항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읍천(邑川)1리는 신라시대부터 어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지역의 자연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읍내(邑內)라고 불렀다고 하니 양남면의 대표마을이 분명하다. 1960년대까지 읍천은 이름값을 했다. 지금은 분동됐지만 읍천2리인 죽전(竹田)마을과 함께 가장 부유한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197가구 407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읍천1리는 어업이 주산업이지만 아직 논과 밭을 일구는 농민들도 함께 살아간다. 1960년대 이전까지 읍천마을에는 돛배 5척과 잠수선 10척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그 배를 소유한 어민들은 부자로 살았다. 지금은 약 40여척에 이르는 어선은 읍천마을의 어업을 이끌어나간다. 소형어선은 가자미, 광어, 도다리 등을 잡고 중형어선은 문어, 고동, 잡어 등을 잡아 마을의 횟집에 우선적으로 소비하고 나머지는 인근 도시의 횟집으로 팔려나간다.
↑↑ 읍천1리 마을 총회에 참석한 시설부 직원들.
읍천마을의 항구는 국가어항(1종)이다. 읍천항이 완공되고 난 후 곧바로 정부가 국가어항으로 지정했다.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 항구의 운영을 국가예산으로 지원받는다. 읍천항이 완공되고 나서는 태풍이 불어도 파도가 마을로 넘어오지 않아 훨씬 살기 좋아졌다. 그 전에는 바다와 마을이 불과 3~4m밖에 떨어지지 않아 파도가 높게 일면 바닷가 집을 덮씌우기 일쑤였고 태풍이 불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뒤 높은 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 읍천마을의 최고령자 92세 엄동섭 할아버지.
조창래 이장은 "긴 방파제와 오목한 항구가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주민이 살아가기에 한결 편안해 졌지만 과거의 마을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며 "나무를 패서 밥을 짓고 바다에서 나는 식물을 건져 올려 죽을 쑤어먹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던 읍천마을이 경주지역 동해안 대표 마을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주상절리가 개방됐기 때문이다. 2009년말 주상절리는 주변의 산책로와 편의시설을 가다듬고 정식 개방됐다. 그 후 주상절리에는 경주에서 대릉원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봄과 가을 관광객이 넘칠 때면 읍천마을의 횟집은 손님으로 넘쳐난다.
조 이장은 "주상절리가 개방되기 전까지는 이 마을에 외지에서 전입 오는 인구가 거의 없었지만 그 후 약 20여 가구가 전입해 와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며 "그러나 그분들이 모두 젊고 합리적인 분들이어서 토착인구들과의 갈등은 일절 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마을과 달리 읍천은 아담하고 깨끗한 마을"이라며 "주차장과 가로등이 완벽하게 정돈돼 있어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아와서 '정겨운 마을'이라고 칭찬한다"고 자랑했다.
↑↑ 조창래 이장(가운데)이 마을 대표들과 마을 현안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다.
10여년 전 읍천마을은 경주시가 벽화마을 시범사업을 했다.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어민들의 삶과 해녀의 모습, 갖가지 해산물, 전통민속 등을 벽화로 장식해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 벽화가 낡아버렸다. 주민들은 이 벽화를 새로 정비해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다. 조 이장은 "월성원전 자매부서인 경영지원실 시설부에 마을 지원사업으로 벽화 정비사업을 해 줄 것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읍천마을 김치남(77) 노인회장은 젊은 시절 잠수일을 하고 어선도 탔던 타고난 어부였다. 김 회장은 "잠수해서 바다 밑으로 내려가 멍게, 전복 등을 잡았고 돛배 타고 나가서 상어도 잡았다"며 "그 때가 45년 전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바다 밑에 내려가 보면 멍게와 전복이 많이 줄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읍천항에 정박한 마을 주민들의 고기잡이배.
읍천의 최고령자인 엄동섭(92)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는 하도 살기 어려워 진저리나 곰피 등으로 죽과 밥을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다"며 "해방 후 상어배도 타고 고기잡이 배에 올라 돈벌이를 하면서 사람 흉내 내면서 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읍천1리는 월성원전 지원금으로 두 채의 건물을 지어 임대사업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마을 운영비를 쓰고 경로잔치도 하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 읍천마을의 벽화.
시설부 배승환 주임은 "자매마을인 읍천1리는 동해안의 대표 명승지인 주상절리를 품은 자랑스러운 마을"이라며 "주변사람들에게 주상절리를 소개하고 읍천1리를 자랑하면서 자매마을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다양한 자매활동을 통해 우리 부서원들 모두가 읍천1리 주민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읍천(邑川)1리는 신라시대부터 어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지역의 자연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읍내(邑內)라고 불렀다고 하니 양남면의 대표마을이 분명하다. 1960년대까지 읍천은 이름값을 했다. 지금은 분동됐지만 읍천2리인 죽전(竹田)마을과 함께 가장 부유한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197가구 407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읍천1리는 어업이 주산업이지만 아직 논과 밭을 일구는 농민들도 함께 살아간다. 1960년대 이전까지 읍천마을에는 돛배 5척과 잠수선 10척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그 배를 소유한 어민들은 부자로 살았다. 지금은 약 40여척에 이르는 어선은 읍천마을의 어업을 이끌어나간다. 소형어선은 가자미, 광어, 도다리 등을 잡고 중형어선은 문어, 고동, 잡어 등을 잡아 마을의 횟집에 우선적으로 소비하고 나머지는 인근 도시의 횟집으로 팔려나간다.
↑↑ 읍천1리 마을 총회에 참석한 시설부 직원들.
읍천마을의 항구는 국가어항(1종)이다. 읍천항이 완공되고 난 후 곧바로 정부가 국가어항으로 지정했다.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 항구의 운영을 국가예산으로 지원받는다. 읍천항이 완공되고 나서는 태풍이 불어도 파도가 마을로 넘어오지 않아 훨씬 살기 좋아졌다. 그 전에는 바다와 마을이 불과 3~4m밖에 떨어지지 않아 파도가 높게 일면 바닷가 집을 덮씌우기 일쑤였고 태풍이 불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뒤 높은 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 읍천마을의 최고령자 92세 엄동섭 할아버지.
조창래 이장은 "긴 방파제와 오목한 항구가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주민이 살아가기에 한결 편안해 졌지만 과거의 마을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며 "나무를 패서 밥을 짓고 바다에서 나는 식물을 건져 올려 죽을 쑤어먹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던 읍천마을이 경주지역 동해안 대표 마을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주상절리가 개방됐기 때문이다. 2009년말 주상절리는 주변의 산책로와 편의시설을 가다듬고 정식 개방됐다. 그 후 주상절리에는 경주에서 대릉원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봄과 가을 관광객이 넘칠 때면 읍천마을의 횟집은 손님으로 넘쳐난다.
조 이장은 "주상절리가 개방되기 전까지는 이 마을에 외지에서 전입 오는 인구가 거의 없었지만 그 후 약 20여 가구가 전입해 와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며 "그러나 그분들이 모두 젊고 합리적인 분들이어서 토착인구들과의 갈등은 일절 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마을과 달리 읍천은 아담하고 깨끗한 마을"이라며 "주차장과 가로등이 완벽하게 정돈돼 있어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아와서 '정겨운 마을'이라고 칭찬한다"고 자랑했다.
↑↑ 조창래 이장(가운데)이 마을 대표들과 마을 현안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다.
10여년 전 읍천마을은 경주시가 벽화마을 시범사업을 했다.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어민들의 삶과 해녀의 모습, 갖가지 해산물, 전통민속 등을 벽화로 장식해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 벽화가 낡아버렸다. 주민들은 이 벽화를 새로 정비해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다. 조 이장은 "월성원전 자매부서인 경영지원실 시설부에 마을 지원사업으로 벽화 정비사업을 해 줄 것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읍천마을 김치남(77) 노인회장은 젊은 시절 잠수일을 하고 어선도 탔던 타고난 어부였다. 김 회장은 "잠수해서 바다 밑으로 내려가 멍게, 전복 등을 잡았고 돛배 타고 나가서 상어도 잡았다"며 "그 때가 45년 전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바다 밑에 내려가 보면 멍게와 전복이 많이 줄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읍천항에 정박한 마을 주민들의 고기잡이배.
읍천의 최고령자인 엄동섭(92)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는 하도 살기 어려워 진저리나 곰피 등으로 죽과 밥을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다"며 "해방 후 상어배도 타고 고기잡이 배에 올라 돈벌이를 하면서 사람 흉내 내면서 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읍천1리는 월성원전 지원금으로 두 채의 건물을 지어 임대사업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마을 운영비를 쓰고 경로잔치도 하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 읍천마을의 벽화.
시설부 배승환 주임은 "자매마을인 읍천1리는 동해안의 대표 명승지인 주상절리를 품은 자랑스러운 마을"이라며 "주변사람들에게 주상절리를 소개하고 읍천1리를 자랑하면서 자매마을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다양한 자매활동을 통해 우리 부서원들 모두가 읍천1리 주민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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