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부의 전설 전해져 내려와 뿌리 깊은 효심 지닌 `효동 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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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7-02 20:07본문
↑↑ 효동1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효동1리는 약 400년 전 김해김씨가 처음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훗날 이 마을에 남편과 시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나이 많은 시아버지를 홀로 공양하던 며느리의 효심이 널리 알려져 효부(孝婦)가 난 마을이라 해서 효동(孝洞)이라고 불렀다.
효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깊은 겨울밤에 호랑이가 집에 나타나 시아버지를 업고 북동쪽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며느리가 이를 보고 쫓아가 시아버지의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시아버지는 놓아두고 나를 잡아가라"고 애원했다. 호랑이는 며느리의 효심에 감복해 시아버지를 놓아주고 산으로 사라졌고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방으로 모셨다. 그러나 호환에 혼이 나가버린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며느리는 목을 놓아 슬피 울었고 그 효심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다.
↑↑ 제1발전고 방사선안전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활동을 마치고 마을 정자에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있다.
효동1리는 효제, 한량골, 중산, 남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고 현재 66가구에 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양남면에서 외동읍으로 넘어가는 외남로가 뚫리기 전에는 효동1리가 효동2리보다 큰 마을이었으나 도로에 인접한 효동2리는 번창하고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효동1리는 차츰 인구가 감소했다. 도로가 나기 전인 1980년대에는 200명이 넘는 주민이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지금 전체 66가구 중 원래 이 마을에 살던 토착인구는 40가구 정도며 나머지는 외지에서 전원주택을 지어 이주했거나 귀농한 인구들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시골마을의 정취를 듬뿍 느끼게 해 준다.
↑↑ 백승열(88, 오른쪽) 노인회장과 김동환 전 이장이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효동1리는 약 10만평의 농토로 농사를 지었다. 논과 밭이 풍부해 밥을 굶는 이가 없다고 할 만큼 살림이 요족했다. 그러나 현재는 농사를 짓던 주민이 모두 고령화 돼 한참 때의 10분의 1에 불과한 1만평으로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다락논들은 대부분 폐농한 상태다. 농사가 서서히 줄어들고 주민들이 하나 둘 대도시로 떠나면서 한 때 이 마을은 40여 가구로 한적해 졌으나 최근 들어 외지인들이 물 좋고 공기 좋은 마을이라며 하나 둘 찾아들면서 점차 인구가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백승열(88) 효동1리 노인회장은 "마을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효사상이 잘 전승되는 곳으로 자손들이 비록 외지에 나가 살지만 주말마다 부모를 찾아와 효도를 하고 있다"며 "이 마을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양봉도 하고 소도 먹이면서 전통적인 농촌마을의 평화롭고 정겨운 분위기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 87세 동갑내기 할머니들이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 회장은 "새마을 운동 전에는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어서 호랑이라도 나올 분위기였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농로를 만들어 지게 대신 수레를 끌 수 있게 됐다"며 "지금은 양남과 입실장날마다 오전 오후 1번씩 버스가 다니지만 교통이 불편해 나이 많은 사람의 병원 출입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효동1리는 다른 양남면에서 외동읍 입실리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그래서 효동1리 주민들의 생활권은 입실이다. 다른 양남면 주민들이 울산을 생활권으로 택하는데 비해 유일하게 경주를 생활권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효동1리에서 입실까지는 6km, 하서리까지는 16km다.
↑↑ 외남로에서 바라본 효동1리 입구.
한은경(87) 할머니는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과 약초, 산나물을 입실장에 내다 팔아서 먹고 살았다"며 "산길을 걸어가면 2시간이 걸리는 시장에 나가려면 새벽별 보고 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김봉선(87) 할머니는 "갓난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쌀이나 잡곡을 이고 고개를 넘어 시장까지 걸었다"며 "그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아졌다"고 웃었다.
↑↑ 효동1리의 아름다운 골목길.
효동1리의 월성원전 자매부서는 제1발전소 방사선안전부다. 남택경 주임은 "양남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효동1리는 경관도 좋고 인심도 후한 마을이라고 소문이 났다"며 "마을이름처럼 어른을 모시는 효성을 이 마을에서 배우고 있으며 자주 찾아뵙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협력할 일을 찾아나서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효동1리는 약 400년 전 김해김씨가 처음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훗날 이 마을에 남편과 시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나이 많은 시아버지를 홀로 공양하던 며느리의 효심이 널리 알려져 효부(孝婦)가 난 마을이라 해서 효동(孝洞)이라고 불렀다.
효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깊은 겨울밤에 호랑이가 집에 나타나 시아버지를 업고 북동쪽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며느리가 이를 보고 쫓아가 시아버지의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시아버지는 놓아두고 나를 잡아가라"고 애원했다. 호랑이는 며느리의 효심에 감복해 시아버지를 놓아주고 산으로 사라졌고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방으로 모셨다. 그러나 호환에 혼이 나가버린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며느리는 목을 놓아 슬피 울었고 그 효심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다.
↑↑ 제1발전고 방사선안전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활동을 마치고 마을 정자에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있다.
효동1리는 효제, 한량골, 중산, 남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고 현재 66가구에 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양남면에서 외동읍으로 넘어가는 외남로가 뚫리기 전에는 효동1리가 효동2리보다 큰 마을이었으나 도로에 인접한 효동2리는 번창하고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효동1리는 차츰 인구가 감소했다. 도로가 나기 전인 1980년대에는 200명이 넘는 주민이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지금 전체 66가구 중 원래 이 마을에 살던 토착인구는 40가구 정도며 나머지는 외지에서 전원주택을 지어 이주했거나 귀농한 인구들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시골마을의 정취를 듬뿍 느끼게 해 준다.
↑↑ 백승열(88, 오른쪽) 노인회장과 김동환 전 이장이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효동1리는 약 10만평의 농토로 농사를 지었다. 논과 밭이 풍부해 밥을 굶는 이가 없다고 할 만큼 살림이 요족했다. 그러나 현재는 농사를 짓던 주민이 모두 고령화 돼 한참 때의 10분의 1에 불과한 1만평으로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다락논들은 대부분 폐농한 상태다. 농사가 서서히 줄어들고 주민들이 하나 둘 대도시로 떠나면서 한 때 이 마을은 40여 가구로 한적해 졌으나 최근 들어 외지인들이 물 좋고 공기 좋은 마을이라며 하나 둘 찾아들면서 점차 인구가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백승열(88) 효동1리 노인회장은 "마을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효사상이 잘 전승되는 곳으로 자손들이 비록 외지에 나가 살지만 주말마다 부모를 찾아와 효도를 하고 있다"며 "이 마을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양봉도 하고 소도 먹이면서 전통적인 농촌마을의 평화롭고 정겨운 분위기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 87세 동갑내기 할머니들이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 회장은 "새마을 운동 전에는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어서 호랑이라도 나올 분위기였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농로를 만들어 지게 대신 수레를 끌 수 있게 됐다"며 "지금은 양남과 입실장날마다 오전 오후 1번씩 버스가 다니지만 교통이 불편해 나이 많은 사람의 병원 출입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효동1리는 다른 양남면에서 외동읍 입실리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그래서 효동1리 주민들의 생활권은 입실이다. 다른 양남면 주민들이 울산을 생활권으로 택하는데 비해 유일하게 경주를 생활권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효동1리에서 입실까지는 6km, 하서리까지는 16km다.
↑↑ 외남로에서 바라본 효동1리 입구.
한은경(87) 할머니는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과 약초, 산나물을 입실장에 내다 팔아서 먹고 살았다"며 "산길을 걸어가면 2시간이 걸리는 시장에 나가려면 새벽별 보고 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김봉선(87) 할머니는 "갓난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쌀이나 잡곡을 이고 고개를 넘어 시장까지 걸었다"며 "그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아졌다"고 웃었다.
↑↑ 효동1리의 아름다운 골목길.
효동1리의 월성원전 자매부서는 제1발전소 방사선안전부다. 남택경 주임은 "양남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효동1리는 경관도 좋고 인심도 후한 마을이라고 소문이 났다"며 "마을이름처럼 어른을 모시는 효성을 이 마을에서 배우고 있으며 자주 찾아뵙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협력할 일을 찾아나서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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