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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제28화 세기적인 대문장가 석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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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7-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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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에 기록된 원문과 해석(괄호 안의 글)이다.
 
  昔强首(석강수는) 中原京沙梁人也(중원경=현재의 충북 충주 사량 사람이다) 父昔諦奈麻(아버지는 나마 석체(昔諦)이다) 其母夢見人有角(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而妊身及生(임신하여 낳았더니) 頭後有高骨(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었다).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아버지 석체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어질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 問曰(묻기를) 此兒頭骨如此(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러하니) 何也(어떻습니까?)하니 答曰(대답하기를) 吾聞之(내가 들으니) 伏羲虎形(복희는 호랑이 모습이고) 女媧蛇身(여와는 뱀의 몸이며) 神農牛頭(신농은 소의 머리 같았고) 皐陶馬口(고요는 입이 말과 같았으니) 則聖賢同類(성현은 다 같은 유로서) 而其相亦有不凡者(그 골상도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바가 있었다) 又觀兒首有黶子(그런데 아이의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난 것을 보니) 於相法(골상법에) 面黶無好(얼굴의 검은 사마귀는 좋지 않으나) 頭黶無惡(머리의 사마귀는 나쁠 것이 없으니) 則此必奇物乎(이는 반드시 기이한 것이리라!) 父還謂其妻曰(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이르기를) 爾子非常兒也(이 아들은 보통 아이가 아니니) 好養育之(잘 길러) 當作將來之國士也(앞으로 나라의 재목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강수는 자라면서 스승을 찾아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는데 들은 바는 비록 낮고 비근하여도 얻는 바는 높고 깊어서 우뚝 솟은 당시의 인걸이 되었다. 드디어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野合)하였는데 서로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나이가 20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중매를 통하여 고을의 용모와 덕행이 있는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니 강수가 사양하면서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성내며 말하기를 “너는 이름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이 모르는 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는 것 또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하니, 강수가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뜰 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은 즉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태종대왕이 즉위하였을 때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그 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왕의 앞에서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러워 하였다. 왕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선생이라 불러야겠다.”하고, 그로 하여금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하였다. 글이 잘되고 뜻을 다 폈음으로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
 
                      석강수는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는 김인문을 석방해줄 것을 청한〈청방인문표 請放仁問表〉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유학을 공부한 학자요 문장가였던 석강수는 구경(九經)을 처음으로 우리나라 방언으로 강론하고 가르침으로써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의 문병(文柄:학문상의 권력)을 관장하여 학자나 선비들을 모아두고 유학의 전승과 학문 고양에 전심하였던 고결한 인품의 재야인물이었다. 신라 고기(古記)에 “문장으로는 석강수(昔强首),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강수는 일찍이 물욕이 없고 생계에  관심이 없어 집이 가난함을 도리어 즐거워하였다.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00섬을 주게하였다.
 
  문무왕이 말하였다.“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하였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즉 석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사찬의 관등을 주고 봉록을 매년 200섬으로 올려 주었다.
 
  강수가 신문대왕 때에 죽으니 장사지내는 비용을 관에서 지급하였으며, 옷가지와 물품을 더욱 많이 주었는데 안사람이 이를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바쳤다. 그 아내는 식량이 궁핍하여져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대신이 이를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租) 100섬을 더 주게 하였더니 그 아내가 사양하여 말하였다.“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듭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끝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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